미술

막스 베크만의 주요작품과 퇴폐 미술전

세상공부하자 2023. 6. 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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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크만의 주요작품과 퇴폐 미술전

1. 막스 베크만의 생애

막스 베크만(Max Beckmann)은 1884년 2월 12일 독일의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일의 주요한 20세기 화가 중 한 명으로 극적인 작품과 독특한 표현 방식으로 유명하다. 베크만은 예술적인 재능을 어린 시절부터 보였으며, 라이프치히 왕립미술학교와 왕립미술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의 작품은 초기에는 신고전주의와 실제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후에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1903년에 프랑크푸르트 아카데미로 이동하여 학문적인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는 여러 유럽 도시를 여행하면서 작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며 살았다. 1915년에는 당시 발전중이던 체험주의와 표현주의적인 요소를 수용하면서 그의 작품은 더욱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베크만의 작품은 나치 독일의 극우 정치적인 견해와 충돌하게 되었다.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나치 정권을 성립한 후, 베크만은 독일 예술가 연맹에서 제명당했으며 작품의 전시와 출판이 금지되었고 이후에는 베크만의 작품이 퇴폐 예술로 분류되어 극우 성향의 나치 정부에 의해 탄압받게 되었다. 1937년에는 베크만의 작품 600여 점이 퇴폐 예술로 규정된 작품들과 함께 퇴폐 예술전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베크만은 독일을 떠나 프라하, 암스테르담, 파리 등으로 숨어있으면서 작품을 계속해서 창작했다. 1947년에는 미국으로 이민하여 워싱턴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작업을 이어갔다. 그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1950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의 상을 받는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28일에 뉴욕에서 돌연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2. 막스 베크만의 주요 작품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혼란과 폭력의 상황을 묘사한 작품이다. 밤은 1918년과 1919년 사이에 그려진 작품으로 베크만이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사회의 혼란과 분열을 반영하고 있다. 밤은 세 명의 흉악한 침입자에 의해 일가족이 비참하게 희생되는 상황을 그려내고 있는데 작품은 큰 규모의 캔버스에 베크만의 특유한 표현주의적인 스타일로 그려져 있으며, 그림 속 인물들은 혼란과 고통을 느끼는 표정과 자세로 묘사되어 있다. 작품의 배경은 어두운 공간으로 적막하고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베크만은 차가운 색조와 강렬한 쉐도우, 뚜렷한 윤곽선을 사용하여 작품에 긴장감과 불안감을 전달한다. 작품 전체는 마치 한 장면을 응시하는 듯한 시각적인 효과를 주며, 관찰자는 그 속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작품의 주인공은 피해자로서의 일가족이며, 그들은 침입자들에 의해 위협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 베크만은 인물들을 현실적으로 묘사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내면적인 감정과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형태와 색채를 왜곡하여 사용한다. 이는 작품에 심리적인 긴장과 갈등을 더욱 강조한다. 

파리의 사교계

이 작품은 1920년대 초반에 그려진 것으로 파리의 상류층 사교계를 묘사한 작품이다. 파리의 사교계는 작품의 주제와 표현 방식을 통해 니체의 염세주의와 인간심리의 기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작품은 파티 장면을 그려내고 있으며, 작품 전체는 파티 장소를 가득 채운 다양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대규모의 캔버스에 그려져 있으며 베크만의 특유한 표현주의적인 스타일과 독특한 화면 구성이 돋보인다. 인물들은 두터운 목탄으로 윤곽이 강조되어 있어 더욱 강렬하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작품은 파리의 상류층 사회에 속한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는데 표면적인 사회적 위엄과 화려함을 가지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빈곤하고 공허함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표정과 자세를 통해 내면적인 갈등과 불안을 나타내고 있다. 베크만은 이들의 얼굴과 몸짓을 통해 인간심리의 복잡성과 모순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의 배경은 어두운 공간으로 파티 장소의 분위기를 혼란스럽고 불안한 상태로 보여준다. 베크만은 색채와 조명을 사용하여 작품에 음영과 감정의 대조를 부각시키는데 이 작품에서도 색상은 대부분 어두운 톤으로 이루어져 있어 심리적인 긴장과 암울한 분위기를 더한다.

출발

이 작품은 1930년대에 그려진 트립티크(triptych) 작품으로 나치의 폭정과 억압적인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출발'은 세 개의 패널로 이루어진 작품인데 양쪽의 어둡고 억압적인 패널과 중앙의 밝은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양쪽 패널에서는 고통과 폭력이 묘사되어 있으며, 인간들이 억압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워 보이며 군중 속에서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가 소멸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중앙의 밝은 패널은 어둡고 고통스러운 분위기를 탈출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패널에는 희망과 구원의 상징이 보여지며 인물들은 자유롭고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중앙 패널은 어둡고 억압적인 환경에서 벗어나며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고 있다. 작품은 나치의 폭정과 억압에 대한 베크만의 비판을 담고 있으며,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회적인 현실에 대한 반영을 보여준다. 베크만은 나치의 독재와 억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는데 이 작품을 통해 그의 분노와 절망을 표현하고자 했다. 작품의 표현주의적인 스타일과 강렬한 색상은 작품의 감정적인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어 관객에게 강한 여운을 남긴다. 베크만은 표면적인 현실을 그림으로써 보다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작품은 어둠과 빛, 억압과 자유, 고통과 구원의 대립을 통해 인간의 삶과 인간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3. 막스 베크만과 히틀러의 퇴폐 미술전

1937년 7월 19일, 나치 독일의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는 퇴폐 미술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는 나치 정권이 근대 예술을 비난하고 차단하기 위한 시도로 엄격한 정치적 및 예술적 통제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이전까지 독일에서는 다양한 현대적 예술 경향이 번성하고 있었지만 나치의 이상적인 독일 인식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퇴폐 미술전은 베크만과 같은 유명한 작가들뿐만 아니라, 다수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작품을 모조리 비난하고 청산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전까지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예술 경향을 추구하던 작품들은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퇴폐(degenerate)"로 규정되었고 그들은 독일 예술의 타락과 부패로 간주되었다. 퇴폐 미술전은 베를린의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되었으며 이전까지는 주로 그곳에서 전시되던 작품들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전시회에서는 약 6,0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며 그 중 약 1,500여 점이 미술 전시장의 벽에 걸려있는 것이 아닌, 도박 중이거나 파산한 대기업들이 소유한 작품으로 전시되었다. 이는 나치의 비난과 탄압을 최대한 강조하기 위한 전람회의 전략적 요소였다. 전시회에서는 히틀러와 나치스의 이상적인 예술관과는 상반된 작품들이 소개되었다. 표현주의, 식민주의적 예술, 사실주의 등 독립적이고 도전적인 예술 형식은 나치 정권에 의해 "타락"과 "퇴폐"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일반 대중에게는 낯설고 부도덕한 것으로 비춰졌으며, 전시회에서는 그들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퇴폐 미술전은 폭력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띤 전시회였다. 작품들은 오로지 비난과 모욕을 목적으로 전시되었으며 전시장은 독일 예술의 "정화"를 상징하기 위해 축소된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이러한 전시회는 독일 국민들에게 "정상적인" 독일 예술과 "타락한" 예술의 대조를 제시하고, 전시된 작품들을 비난하고 반대하는 것을 유도하기 위한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일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퇴폐 미술전은 나치스의 독재적 통제와 예술의 자유를 탄압하는 시도로 독일 예술에 큰 타격을 주었는데 이 전시회가 예술의 자유와 다양성을 탄압하는 시도로서만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독일 예술 역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되며 오늘날까지도 그 시대의 독재주의와 예술의 복잡한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퇴폐 미술전은 독립적이고 도전적인 예술 형식들이 어떻게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와의 충돌과 대립 속에서 존재하고 지속되어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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